Saturday, December 31, 2011

두보


귀안

봄에 만리밖의 나그네
난리 그쳐 돌아갈 해 언제인가
강가의 기러기는 애간장을 끊으며
내고향 북쪽으로 높이높이 날아가네

두보가 53세 (764년) 피난지 성도에서 지은 오언 절구(五言絶句)의 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안녹산의 난으로 고향을 등지고 만리 밖 타향에서 유랑하던 시인이 고향에 대한 향수 기러기에 빗대어 애절하게 노래하고있다. 이즈음 그는 귀는 멀고, 다리는 절어오며, 폐결핵과 중풍으로 기동조차 어렵고, 삭풍에 소매자락은 낡고 헤어져, 더이상 살 소망이 없던 때였다.

두보(712~770)는 당나라 시대 대표적 시인이었다. 부친때부터 가세가 기울어 평생 가난한 생활을 면치 못하였다. 도 여타 문인들과 같이 벼슬을 하기 위해 과거시험에 여러번 응시하였으나 거듭 좌절을 겪고, 오, 월, 제, 조나라의 땅을유랑다, 37세 낮은 관직을 얻었으나 궁핍한 생활을 면치 못하였다. 이때 그의 어린 아들도 굶어 죽는다. 두보는 수도 장안의 귀족들이 호화방탕한 생활을 누리는것과 가난한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려 거리에 얼어죽은모습을 친히 목격하며 <부자집에서는 술과 고기 썩는냄새가 나고 길가에는 얼어 죽는 사람의 시체가 뒹구는 구나>하고 탄식하였. 고난을 겪으며, 두보는 통치자들의 부패와 인민의 고난을 함께 인식하게 되고 나라와 인민을 우려하는 시인 되었다.

어렵게 얻은 관직도 한달도 안돼 전란으로 인해 버려두고, 두보는 다시금 정처없이 떠돌아다니게된다. 식솔들을 거느리고 중국 서남부의 성도에 가서 친구들의 도움으로 년간 피난생활을 하게된다. 이즈음 그는 <초가집이 추풍에 무너졌네>라는 시를 지어 온 집안이 난에 시달리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60세를 못넘기고 두보는 가난과 질병으로 망명의 길에서 사망하였다. 평생 가난과 질병과 고통가운데 끝없는 피난살이를 해야했던 두보. 그는 실로 신고를 많이 겪고 슬픔을 아는 자라, 그를 일컬어 후대인들은 시성이라고 칭하였다. 죽기전 그는 국파산하재로 우리에게 낮익은 오언절구춘망이라는 시를 남긴다.

춘망

나라는 망하고 산천 남아있
봄빛 가득한 성터엔 초목만이 깊어졌네
시절애상하니 꽃 봐도 눈물나고
한 많은 생이별에 새소리맘을 울리는구나
석 달을 연 이어서 봉화오르니
기다리는 고향 소식 만금보다 귀하구나
흰머리 긁을 수록 더욱 드물어져
이제는 비녀조차 꽂을 수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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